[기획] 잊혀진 역사에서 세계의 유산으로: 국채보상운동 120주년을 향한 여정
— 대구에서 피어난 ‘시티즌스 오블리주’, 교육과 연대로 미래 세대와 세계를 잇다 —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김영균 사무처장·박효승 학예실장에게 듣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대구=대구교육신문) 이본원 기자 -
1907년 대구에서 태동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경제 침탈에 맞서 담배를 끊고 패물을 모으며 나라 빚을 갚고자 떨쳐 일어난 민초들의 거국적 구국 운동이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오랜 세월 역사의 뒤안길에 머물렀던 이 숭고한 기억은, 지역 원로와 시민들이 뜻을 모아 출범시킨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의 헌신으로 온전히 되살아났다. 1999년 도심 속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조성을 시작으로 국채보상로 명명, 2011년 시민 성금으로 일군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건립, 그리고 2023년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 개관에 이르기까지 반세기를 묵묵히 이어온 노력은 대구의 정체성을 ‘근대 시민정신’의 발상지로 확고히 정립시켰다.
기념사업회의 발걸음은 지역의 자긍심을 넘어 인류 공동의 보편적 가치로 뻗어나갔다. 2007년 100주년 총서 발간을 필두로 전국 2,500여 건의 기록물을 발굴·체계화했고, 100만 서명운동과 동아시아 역사 갈등이라는 외교적 난관 속에서도 단순한 항일 프레임을 넘어선 ‘책임과 나눔’이라는 세계사적 보편 가치(OUV)를 설득해 냈다. 그 결과 2017년 10월 2,475건의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당당히 등재되는 쾌거를 거뒀다. 사업회를 총괄하며 등재와 확산의 전 과정을 지휘해 온 김영균 사무처장은 “유럽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소수 특권층의 도덕적 의무라면, 국채보상운동은 평범한 대중이 주도적으로 연대한 한국 고유의 ‘시티즌스 오블리주(시민의 책임)’ 정신”이라며 “유네스코 역시 국가 부채와 경제 주권이라는 위기 앞에서 민초들이 보여준 자발적 연대와 평화적 저항의 기록에 깊이 공감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등재 이후 사업회는 디지털 전환과 교육 현장의 눈높이에 맞춘 다각적인 정신 확산 사업에 매진해 왔다. 2023년 개관한 국채보상운동기록전시관 내 첨단 영상실과 메타버스 체험관을 통해 미래 세대와의 소통 창구를 넓히는 한편, 전국 학생 대상 역사 퀴즈 대회와 시민 참여형 문화제를 쉼 없이 개최했다. 또한 성주·고령·상주 등 주요 발상지에 기념비를 세우며 영남권을 아우르는 역사적 연대망을 탄탄히 다졌다. 김영균 사무처장은 “국채보상운동의 본질은 위기 상황에서 남을 탓하기보다 내가 먼저 비녀를 뽑고 담배를 끊었던 실천적 시민 연대”라며 “지역 공동체가 각자도생과 분열로 흔들릴 때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바로 이 자리, 대구에 있다”고 강조했다.
120년 전 선열들의 희생은 오늘날 대구 시민의 일상과 기부 문화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국채보상운동 발발일인 2월 21일은 ‘대구시민의 날’로 제정되어 지역 공동체의 뿌리가 되었으며, 2023년 대구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33명이 서상돈 지사를 특별회원으로 추대하고 성금을 모은 사례는 대구 특유의 ‘나눔 DNA’가 건재함을 보여준다. 사료 발굴과 전시·교육 콘텐츠 기획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는 박효승 학예실장은 “국채보상운동은 활자 속에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와도 생생히 호흡해야 할 살아있는 교육 자산”이라며 “앞으로도 미래 세대가 효능감을 느끼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양질의 학술 연구와 에듀테크 콘텐츠 개발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전했다.
국채보상운동 120주년이자 세계기록유산 등재 10주년을 맞는 2027년을 앞두고, 사업회는 두 번째 회갑을 지나 세 번째 주기를 여는 ‘역사적 대전환’을 선언했다. 김광제 선생의 고향 보령과 최초 발의지 부산, 나아가 안중근 지사의 활동지 평양과 미주 지역까지 연결하는 ‘공간적 연대의 광역화’, 대구에 유네스코 공인 ‘세계 시민책임 교육센터’를 유치하고 글로벌 부채·기후·빈곤 담론을 주도하는 ‘세계시민정신 거점 구축’, 민·관이 결집하는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발족해 국가적 기념행사로 격상시키는 ‘3대 핵심 비전’이 그 중심에 있다. 박효승 학예실장은 “2027년 120주년은 대구의 유산이 한반도를 넘어 전 인류의 지속 가능한 연대를 이끄는 등불로 거듭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국가적 행사로의 격상과 세계시민 거점 조성을 위해 학술·전시·시민사회의 모든 역량을 모아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