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람의 문학 정원 18] 「목재 해부학」... 천수호 시인
<한보람의 문학정원>
목재 해부학
죽은 나무를 잘라 보는 것이 학문이 되기도 합니다 이때 나뭇잎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잎이 파닥거리는 것은 사정없이 잘라 버려도 됩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의 목을 묶어 버릴 것처럼 강강술래의 구심력으로 돌고 있는 나이테가 사실은 바흐의 샤콘 선율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나무가 연구 대상이 되기 전에 악기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꽤나 낭만적인 일이겠지만 혹독한 인파를 견뎌 낸 것이 고유한 공명의 명품이 됩니다 나무를 썰고 그 면면에 새겨진 설근문자(舌根文字)를 뽑아낸다는 소문은 빛이 사그라든 밤의 숲에서 들려온 소식입니다 유난히 눈이 많이 쏟아진 해입니다 맹물이 얼어붙어 나무를 위협한 고드름의 방식은 이미 학문의 범위를 벗어났고 유행을 이끄는 것이 딱히 있는 분위기도 아니어서 한파에 강한 은박지 소재가 패션계를 이끌 때입니다 각자의 개성은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나무는 종종 세이렌의 곡조를 흉내 냅니다 밀랍은 도대체 누구에게 배분한 것인지 광장까지 파도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쪼개 보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학문이란 게 일찌감치부터 활짝 갈라서 들여다보는 것이어서 나뭇잎 한 장이 파닥거리며 잘린 가지 속을 파고 들어갈 듯이 자꾸 재촉하고 있습니다
- 「목재 해부학」,『내일의 유리 예보』, 2026. 천수호
<한보람 시인의 시선>
나무를 자르자 숨겨둔 시간이 둥근 나이테로 드러난다.
잘린 가지에서 파닥이는 잎은 아직 생의 온기를 놓지 못한 듯하다.
나이테는 나무가 견딘 계절의 문장이다.
눈과 한파는 나무의 몸속에 깊은 무늬를 새긴다.
상처도 오래 견디면 하나의 기록이 된다.
나무의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한 생의 시간을 읽는 일이다.
어쩌면 사람에게도 보이지 않는 나이테가 있다.